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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지 못한 날, 길을 잘못 들어 만난 터널 풍경

by jbzip-photostory 2025. 5. 16.

길을 잘못 들었을 뿐인데, 나를 흔드는 장면을 만났다

사진을 찍지 못한 날, 기억에 남은 장면들

사진 친구들과 함께 촬영하기로 한 날이었다. 하지만 여의치 않게 셔터를 한 번도 누르지 못했다. 비가 오는 이런 날은 더 진득한 사진을 담을 수 있어 좋지만, 내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조금 늦은 점심을 먹고 사진서가라는 카페로 향했다. 사진서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여러 사진집을 보는데, 두 시간이 훌쩍 지나고 말았다. 참고로 사진서가는 시간당 카페를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다. 그렇게 돌아가는 길, 내비게이션을 놓치고 잘못 든 길 위에서 이 풍경을 만났다. 익숙하지 않은 도로, 반쯤은 억지로 돌아가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 어쩌면 모든 계획이 틀어졌기에 볼 수 있었던 장면들이다. 애초에 찍고자 했던 어떤 사진보다 오래 남을지 모르겠다.

낯선 도시, 낯선 입구

도시 풍경 속 터널 입구로 진입하는 자동차들의 모습
고층 빌딩 사이로 난 도로 위, 도심의 터널 속으로 진입하는 순간을 담았다.

 

첫 번째 사진은 터널 입구에서 찍었다. 전면 유리창 너머로 도시의 빌딩들이 수직으로 솟아 있고, 그 틈을 뚫고 내려가는 터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터널은 무언가를 향한 입구처럼 보였다. 조금은 숨이 막히는 듯한 도시의 느낌, 복잡한 건물들 속에서 이 터널은 하나의 탈출구 같기도 했다. 자동차는 미끄러지듯 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었던 걸까. 목적지로 향하는 중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돌아가는 길이었을까.

어두운 벽 속을 지나는 중

터널 내부를 빠르게 지나는 자동차와 구조물의 추상적인 흑백 이미지
빛이 약해지는 공간을 통과하며 차창 밖으로 흐르는 벽이 속도감을 느끼게 한다.

 

두 번째 사진은 터널 속을 달리는 중에 찍었다. 암전과도 같은 그 순간은 아주 짧았지만, 마치 수 초간의 몰입처럼 깊은 잔상을 남겼다. 터널은 사람이 만든 인공의 구조물이지만, 그 안은 늘 원초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불안, 기대, 설렘, 그리고 어둠.

사진 속 구조물은 달리는 차창 밖으로 빠르게 흘러가고 있고, 그 흔들림이 마치 시간의 흐름을 보는 것 같다. 프레임은 정확하게 나뉘지 않고, 움직임과 흔들림으로 만들어진 불완전한 기하. 이곳은 완전히 현실이지만, 한순간 꿈처럼 느껴진다.

촬영 팁을 하나 덧붙이자면, 차 안에서 움직이는 피사체를 촬영할 땐 셔터 속도를 낮추어 ‘흐름’을 그대로 담는 것은 또 다른 감성을 표현할 수 있다. ISO를 적절히 조절하고, 흔들림을 허용하는 순간에 감성 숨어 있다.

터널의 끝, 다시 빛

흑백 대비가 강한 터널 출구를 통과하는 차량들과 바깥 풍경
어둠을 지나 밝은 공간으로 나아가는 순간, 터널 출구의 역광과 빨간 후미등이 인상적인 사진

 

세 번째 사진은 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을 찍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기도 했다. 정면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하얀빛은 현실보다 더 비현실적이었다. 마치 반전된 세상, 하얀 어둠 속을 뚫고 나오는 느낌. 블랙과 화이트의 대비가 강하게 엇갈리는 구도에 빨간색 브레이크 등이 주는 경고! 단순한 기록 이상의 것을 암시했다.

차는 다시 평범한 도로로 나왔고, 그때서야 내가 찍은 사진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길을 잘못 들어 우회한 끝에 만난 터널. 그 속에서 나는 이질적인 두 장면을 보았고, 사진은 그 조각들을 붙잡았다.

어쩌면 터널은 늘 삶을 닮았다. 입구는 혼란스럽고, 내부는 어둡고 복잡하며, 끝은 어쩌면 이전보다 조금 더 선명하다.

그날 사진은 한 장도 찍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세 장이 남았다. 어긋난 계획이 만들어준 예기치 않은 수확이다.


※ 이 블로그 글에 사용된 사진은 모두 직접 촬영한 작업물입니다.
※ 무단 복제 및 도용을 금지합니다.